○ 횡간도 사자바위
○ 보길도 가는 연안 여객선에서
○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사적
-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신한다.
- 이 때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 윤선도(1587~1671)는 왕을 돕기 위해 강화도로 향했으나
도중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세상 볼 면목이 없다며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.
- 남쪽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고산은 섬 하나에 들렀는데 그 풍광에 반하여 여기에 은신처를 잡게되니
그 곳이 보길도다.
- 격자봉(425m)에 올라 지세를 살핀 고산은 마치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는
산 아래에 살림집 낙서재를 짓고 건너편 산 중턱에 동천석실을 지었다
- 그리고 동네 아래쪽에 계곡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드니 세연정이다
- 그 후 고산은 13년간 부용동을 가꾸어 당시엔 건물이 모두 25채였다고 한다.
○ 세연정 - 조선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이 곳에서 어부사시사에 맞추어 악공은 피리를 불고,
무희는 춤추게 하였다 한다.
○ 동천석실
- 산 중턱 바위 위에 동천석실이 보인다. 석실 바위 아래에는 차를 다려 마셨다는 샘이 있다.
○ 동천석실에서 내려다 본 낙서재와 곡수당
- 1637년에 입도하여 주산인 격자봉의 혈맥을 좇아 집터를 잡고, 낙서재를 짓고 주된 주거공간으로 삼고
○ 곡수당
- 곡수당은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, 석정, 석가산, 평대, 연지, 다리, 화계 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었던
곳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휴식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함.
○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씐바위
- 보길도 동쪽 끝의 백도리 해변 석벽으로 조선시대 대유학자이며,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선생이
1689년 이조 숙종(15년)때 왕세자 책봉문제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이
삭탈된 뒤 제주도로 귀양 가던중 풍랑을 만나 상륙하였던 곳으로
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을 한시로 새겨놓았다 하나 오래되어 글씨를 찾을 수는 없었다.
여든셋 늙은 몸이
푸른바다 한 가운데 떠 있구나
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
세번이나 쫒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(노나라 학자 류하혜의 고사)
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
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 밖에
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
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
○ 보길도를 뒤로하고
- 노화도 동천항을 떠나오면서, 저 멀리 보길도가 아스라이 보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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